1. 광해군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그 뒤를 이어 1608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광해군은 정실의 소생이 아닌 선조의 후궁 소생으로서 출신에 있어서 인목왕후(선조의 계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에 비해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광해군이 왕으로서 정사를 펼쳐나가는데 어려움을 가져오는 주요한 원인이 됩니다.
당시 세자 책봉과 관련하여, 영창대군의 혈통을 중시하면서 임진왜란의 공이 있는 훈척 세력의 정치관여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며 명분을 내세우던 '소북'과 광해군의 출신상의 불리한 점보다는 임진왜란 중에 세운 공을 높이 평가하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려는 '대북'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대북'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 오르게 되고, 권력을 잡게 된 대북파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과 '호적조사사업'을 실시하였으며, '공납' 대신 처음으로 '대동법'을 실시(경기도 지방에 한정)하고 성벽과 무기를 수리하며 군사훈련을 강화시키게 됩니다.
또한 장기간의 전쟁을 전후로 연이은 기근과 질병의 만연으로 목숨을 잃는 백성들의 숫자가 상당했었음을 인지하고 '허준'을 중심으로 '동의보감(1596~1610년)'을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조선 초기에 정리되었던 의학서들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여주었으며 동아사이 의학발전에도 크게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국조보감, 경국대전, 악학궤범, 고려사,용비어천가' 등 조선 초에 간행되었던 문헌들을 다시 편찬하였으며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에 사고를 새로 만드는 등 문화의 중흥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2. 중립외교
광해군의 여러 업적 가운데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외교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보내 도움을 주었으나, 이후 국력이 쇠약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서 압록강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여진족이 급격하게 사회를 통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는 '흥경노성'을 근거로 하여 주변의 여진족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면서 1616년(광해군 8년)에 마침내 '후금'을 건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금은 서쪽으로 세력을 뻗어나가면서 마침내 명나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이에 명나라는 후금에 맞서는 한편, 조선에 군대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1619년 13,000명의 병력을 지원하였으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후금과 휴전을 맺고 돌아옵니다.
이후 명나라는 군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에 주둔시켰으나, 조선은 명나라 부대에 식량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며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명과 후금 사이에 전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면서 조선의 내치와 국방에 힘쓰는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던 것이었습니다.
3. 인조반정
광해군은 붕당정치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이원익을 비롯한 '남인'과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인'을 고루 등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과 자신의 동생이라 할 수 있는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에 위협을 느낀 광해군은 1613년 (광해군 5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하게 됩니다.
이를 '계축옥사' 라고 합니다.
또한 광해군은 남인의 추앙을 받았던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제거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내쫓는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유생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당시 광해군의 개혁정책은 장기간의 전란 이후 나라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워나가는데 도움은 되었지만, 급진적이었던 탓에 명분을 중시하던 성리학과 어긋나는 점이 많아서 사람 대부분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이후 1623년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파는 광해군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 소생인 원종의 아들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게 됩니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당시 광해군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페모살제"의 패륜을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유배되었으며, 광해군을 추종했던 대북파는 모두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4.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파는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하여 자신들의 공로에 대한 대가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평안북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는 사건(1642년 '이괄의 난')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남도 군사에 의해 평정되었지만, 나라는 더욱 어려워지고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괄의 난이 정리된 후 서인정권은 '사림을 수용할 것'을 내세우면서 이원익 등 일부 남인들을 등용하여 붕당정치를 펼쳤습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친명반금'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력이 날로 쇠퇴해져 가는 명나라에 친선을 유지하고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후금과는 관계를 끊게 됩니다.
후금의 조선에 대한 불만은 점점 높아져 가는 가운데,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쳐서 인조는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알리게 됩니다.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후금은 이를 빌미로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1627년(인조 5년)에 30,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오게 됩니다.
이를 '정묘호란' 이라고 합니다.
조선은 관군과 의병이 힘을 합하여 후금의 군대에 맞서 싸웠으며, 양측은 서로 사정에 의해 전쟁 중간에 싸움을 멈추고 '강화'를 맺게 됩니다.
당시 후금은 조선의 반격으로 보급로가 끊겨서 장기간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으며, 조선 역시 준비가 완전하지 못했던 차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강화를 통해 조선과 후금의 외교관계는 다시 재개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금은 이후 요서지방과 내몽고를 정복하여 점점 더 큰 힘을 키우게 되었으며, 1636년(인조 14년)에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수도를 '심양'에 정하였으며 태종 스스로 황제라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청은 황제의 나라로서 조선에 '군신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격분한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의 요구에 대해 '외교적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 하자는 '주화론'(이귀, 최명길 등 인조반정의 공신들)과 힘의 강약을 따지지 말고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주전론'(조경, 김상헌 등 소장파 관인들) 이 서로 맞서게 됩니다.
결국 대세는 주전론으로 기울게 되면서 조선은 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에 청은 1636년 12월, 1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은 지 5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7일 만에 조선의 왕과 대신들이 피신해 있던 남한산성을 포위하게 됩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4,000명 정도의 군인과 40여 일 정도의 식량만 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의 군대와 맞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인조는 45일간의 저항을 끝으로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의 청나라 진영으로 나아가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조선과 청은 군신의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청나라는 '소현, 봉림' 두 명의 왕자와 척화론(전쟁 발발 시 명분과 의리를 위해 싸움을 마다하지 않음)들을 인질로 데려가게 됩니다.
인질들 가운데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끌려가서도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들을 '삼학사' 라 부르며 후세에 추앙을 받게 됩니다.
조선의 의병들은 조정의 청에 대한 항복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을 이어나가는데, 박철산이 이끄는 의병부대의 경우 용강 부근의 적산에서 청의 주력부대를 맞이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의주부윤 임경업은 1642년 명과 연결하여 청을 공격하려고 계획을 하다가 실패하여 청에 잡혀있다가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1636년 청나라의 침략에 따라 발발한 전쟁을 '병자호란'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광해군과 중립외교, 정묘/병자 호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효종의 왕조 부흥 노력 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49. 인조, 효종 그리고 현종 (2) | 2022.09.01 |
---|---|
47. 임진왜란 이후 대일 관계 (0) | 2022.08.02 |
46. 임진왜란 (0) | 2022.07.14 |
45. 사림의 문화 (0) | 2022.07.08 |
44. 붕당과 서원 그리고 향약 (0) | 2022.07.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