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붕당
조선의 선조(1567~1608년)는 사림 출신들을 대거 중앙 관직에 등용을 하였고, 이 시기에는 사림이 온전히 정국을 주도하였습니다.
사림 출신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사림 사회 내부에도 분열과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유명한 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학문과 정치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붕당'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성리학은 '도덕적으로 수양된 군자들이 붕당을 형성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성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붕당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붕당은 '선조 8년(157년)'에 '심의겸'을 따르는 기성 사림을 '서인'이라 부르고, '김효원'을 내세운 신진 사림을 '동인'이라 부르게 되면서 탄생하게 됩니다.
'서인과 동인'은 심의겸이 '서울의 서쪽'에 살고,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지게 된 호칭 이었습니다.
이들 동인과 서인은 문반의 인사추천권을 가지고 있던 '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과 김효원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동인은 안동지방의 이황과 지리산 지역의 조식, 개성의 서경덕 학풍을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서인은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의 기득권 선비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동인은 선비들의 '수양(수기)'에 중점을 두고 '도덕성의 제고'를 강조하였으나, 서인은 '치인'을 중심으로 제도 개혁을 통한 '부국안민을 추구'하였습니다.
초기에 동인과 서인의 분당은 율곡 이이가 중간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면서 이렇다 할 충돌이 없었으나, 선조 17년(1584년)에 이이가 죽고 나서 '유성룡, 이산해' 등의 동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조 22년(1589년)에 동인인 '정여립 일당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는 일(정여립 모반사건)'이 발생을 하면서 다수의 동인들이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합니다.
이후 선조 24년(1591년)에는 서인인 좌의정 '정철'이 선조에게 세자 책봉을 건의하였는데, 동인이 이를 문제 삼아서 서인을 몰아내게 됩니다.
서인들이 밀려나게 되면서 서인들에 대한 처벌을 두고 동인 내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는데, 강경파는 '북인', 온건파는 '남인'이라 불리었습니다.
당시 북인은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었고, 남인은 이황의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기축옥사 당시에 북인들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북인들은 서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서인들이 상당수 축출되고 나서 동인 가운데서도 북인이 주축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와중에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발생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중에 선조는 '후궁 공빈 김 씨'의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을 하였고, 광해군은 대일 항전에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왜란이 끝나고 선조 34년에 정실부인인 인목왕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출생하면서 북인들 내부에서 또다시 분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대북은 광해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고, 소북은 영창대군의 적통을 강조하였습니다.
이후 선조가 죽고 광해군(1608~1623년)이 즉위하면서 대북이 실권을 잡게 됩니다.
2. 서원
'서원'은 당시 지방 선비들이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화가 빈번하게 발생함에 따라 정치에 뜻을 접은 선비들이 아동 교육에 집중을 하기 시작하면서 '학교'의 조직과 기능뿐만 아니라, 선배 성리학자를 기리는 '사당'을 통합한 '서원'이 탄생하게 됩니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 37년(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었습니다.
이후 백운동서원은 '명종 5년(1550년)'에 풍기군수로 새롭게 부임한 '이황'이 임금에게 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하사 받고 노비와 토지 등을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받게 됩니다.
이처럼 국가로부터 '편액'을 하사받고 각종 지원을 받는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하며, 국가의 서원 장려정책에 따라서 명종 대에 17개였던 서원의 숫자가 선조 시기에는 사액서원의 숫자만 100여 개를 넘게 됩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원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서 최대 1천여 개의 서원이 생겨났으며, 그 가운데 약 3분의 1이 사액서원이었습니다.
초기 서원은 관학인 '향교'와 경쟁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그 숫자도 많아지고 권위도 높아지게 됩니다. 이에 따라 양반의 자제들은 '서원'에, 평민의 자제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었습니다.
서원은 조선의 유학을 발전시키고 향촌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만, 서원마다 모시는 '선현'들이 달라서 서원이 붕당과 학파 형성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면서 국가경제에 해를 끼치기도 함에 따라서 조선 후기에 와서는 서원을 통제하는 것이 국가 정책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3. 향약
'향약'은 서원과 더불어 지방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향촌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최초의 향약은 중종 대에 '조광조'가 '여씨향약'을 국문으로 번역, 도입하면서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향약의 주요 강령은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향촌의 사람들이 자체적인 규약을 맺음으로써 착한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규찰하며, 서로 예의를 지키고 어려운 일은 서로 돕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당시 향촌사회를 주도하는 사림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중앙의 훈구세력들의 향촌사회에 대한 장악력이 줄어들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조광조와 그 일파가 몰락했을 때는 향약이 위축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명종,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이 다시 권력을 회복하면서 지방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향약들이 시행됩니다. 당시 영남지방의 경우 이황이 만든 '예안향약'이 유행하였으며, 기호지방에서는 이이의 '청주와 해주 향약'이 모범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림들은 향약을 시행하면서 '향안(양반 사족의 명단)'을 작성하고 '유향소'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향회(지방 의회에 해당)'를 조직하여 공론(여론)을 형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향약은 더욱 발전하면서 마을단위, 친족 단위 등으로 확산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양반과 사족층의 보수화로 향약은 농민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6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향촌 자치가 자리를 잡아가게 됨에 따라서 기존의 '관'과 '민'의 지배관계가 '사'와 '민'으로 대체되는 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붕당과 서원, 향약 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사림의 문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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