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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41. 조선 초기 문학과 예술 등

by 늦게차는큰그릇 202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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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조선 초기 문학과 건축, 공예 그리고 그림 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문학

조선 초기 문학으로 먼저 '동문선'을 들 수 있겠습니다. 동문선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역대 시와 산문의 정수를 뽑아 놓은 133권의 방대한 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종9년(1478년)' 서거정 등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동문선의 서문에는 '우리나라의 문학이 중국과는 다른 독자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후 '중종 12년(1517년)'에는 동문선 이후의 글들을 모아서 '속동문선(22권)'을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의 창업과정을 찬미한 '용비어천가'라든지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월인천강지곡' 등도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시조' 역시 유행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조는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하면서 지은 것이나, 남이가 북방을 평정하면서 지은 것처럼 '조선이라는 신생국가의 패기'가 잘 드러난 것들이 있는 반면, 맹사성의 '강호사시사'와 같은 '서정적인 노래'도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 문학의 또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잡기 혹은 패설' 작품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패설 작품'은 일정한 형식이 없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으로, 서거정의 '필원잡기', 성현의 '용재총화', 강희맹의 '촌담해이'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패설 작품은 조정 관료들의 기행에서부터 일반 평민이나 노비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 사람들의 생활풍속과 감정, 역사의식들을 담고 있어서 당시의 사회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패설 문학이 유행하면서 '허구적인 요소'를 포함한 '소설'도 유행을 하였습니다. 세조 대에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에 실린 작품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금오신화에서는 평양, 개성, 경주 등 유서 깊은 고도시를 배경으로 남녀 간의 애정, 불의에 대한 비판, 민중 속에서 전승되어 온 역사의식 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2. 건축과 공예

조선 초기 건축양식은 검소함을 강조하는 유교의 이념에 따라서 사치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를 법으로 도 제정하여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집의 크기와 높이를 제한 하였습니다. 

 

궁궐의 경우 장엄함을 살리면서도 검소함을 추구하였으며, 관료의 경우 집을 지을 때 최고 40칸을, 평민은 10칸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건물의 외관에 화려한 장식을 하는 것도 제한하였으며, 실용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건축물들은 검소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서울의 남대문(숭례문), 창경궁의 홍화문, 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 등이 대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연못, 정자, 숲 등을 조성하는 '정원문화'도 발달을 하였는데, 되도록이면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나라 정원양식의 특징입니다. 대표적으로 창덕궁의 '후원'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편 사찰건축물도 발달을 하였는데, 양주의 회암사, 여주의 신륵사 조사전, 해인사의 장경판전, 원각사지 10층 석탑 등이 있습니다.

 

조선 초기 생활용품을 비롯한 공예작품들 역시 이전 시대에 비해서 한층 검소해졌습니다. 금이나 은과 같은 고급 보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흙, 나무, 왕골 등과 같이 일상의 평범한 재료들을 활용한 생활용품들이 유행을 하였습니다.

 

궁중에서도 금이나 은그릇을 없애고 '도자기'를 사용하면서 '백자에 분을 바른 분청사기'가 유행을 하였습니다. 분청사기는 고려시대의 청자와 달리 귀족적인 취향은 사라지고 깨끗하고 소박한 백자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것이 특징입니다.

 

백자에 그려넣은 문양 역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드러낼 수 있는 '사군자'나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모란'등이 많이 유행하였습니다.

 

일상생활에 실용적인 '돗자리'와 '대자리 공예' 역시 뛰어났는데, 강화도 '화문석'은 중국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조공품으로 활용되었습니다.

 

3. 그림

조선 초기 그림은 나라에 소속된 전문 화원들이 그린 그림과 사대부들이 그린 '문인화'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화원들은 '도화서'에 소속되어 임금이나 세자, 대신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국가의 여러 행사들을 그림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지도를 제작하는 일도 담당하였습니다.

 

이들 화원들은 최고 종 6품까지의 벼슬을 받을 수 있는 '공무원 화가'들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화원들은 주로 나라에서 지시한 그림들을 그렸으나, 여가시간에는 일반 사대부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그림의 소재로는 '산수, 인물, 짐승, 화조' 등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화초의 경우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매난국죽)'이 유행하였습니다.

 

조선 초기 화원 중에는 '안견'이 특히 뛰어났는데,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다는 '몽유도원도(1447년)'는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참고로 원본은 현재 일본 천리대학에 소장 중에 있습니다.)

 

안견의 화풍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화풍을 연구한 후 자신만의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특히 산수의 표현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안견은 벼슬이 '정 4품'에 까지 올랐으며, 당시 인물화를 잘 그려서 벼슬이 '당상관(정 3품)'에 이른 '최경'과 더불어 화원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이상좌'라는 노비 출신의 화원도 유명하였는데, 당시 중종과 명종의 인정을 받으면서 '송하보월도', '노엽달마도' 등의 걸작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전문 화원이 아닌 일반 사대부 출신들 가운데서는 '강희안, 강희맹' 형제가 유명하였습니다. 

 

문인이었던 '신숙주'의 경우 '화기'를 지음으로써 '회화사'를 정리하여 미술이론에 공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 발달한 그림들은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화원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였고, 사신들이 일본에 가서 글씨와 그림을 남기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조선 초기 문학과 건축, 공예, 그림 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조선 초기 음악과 종교, 풍속 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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