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도
조선시대 군대는 '양인개병제'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즉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 남자'는 모두 군역의 의무를 담당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 중 일부는 직접 군인 병사가 되거나, 아니면 병사로서 군역의 의무를 직접 담당하는 사람을 보조하는 '보인(봉족)'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보인들의 경우 군인 병사의 식량, 의복 등의 경비를 부담하였으며, 매년 무명 1 필을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참고로 토지가 3~4 결 이상이 되는 중산층 양인에게는 보인이 할당되지 않았습니다.)
나라에서는 지속적으로 군역을 담당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비를 해방시켜서 '양인' 인구를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3년마다 '호적조사사업'을 벌였으며 그 결과 태조 대에 약 40여만명이던 군역 대상자가 세종 대에 와서는 70여만 명으로, 세조 대에 와서는 100여만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양인 가운데 군역을 면제 받을 수 있는 대상은 '현직 관원, 학생'이었습니다. 왕의 친척, 공신, 고급 관원의 자제 역시 군역에 예외는 없었지만, 이들은 주로 국왕의 호위와 시종, 왕궁의 경비 등을 담당하면서 일반 군역 대상자들에 비해 보다 좋은 보직과 대우를 받았습니다.
조선의 중앙 군대는 '오위도총부' 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이 아래에는 5개의 '군단'이 있었으며 이들이 조선의 '중앙군'으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최종 지휘책임은 '문반' 출신이 맡았습니다. 그 외에도 군인의 훈련과 무과시험을 관장하는 '훈련원', 무관의 최고기관인 '중추부' 등이 속해 있었습니다.
지방군의 경우, 세조 대에 이르러 '진관체제' 로 편입이 되어 운영되었습니다. 진관체제란, 각 도마다 1개 혹은 2개의 '병영'을 두고 '병마절도사'가 해당 구역의 지휘권을 행사하였으며, 병영의 아래에는 '거진'을 두어 거진의 '수령'이 군현의 군 통수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전국이 '지역단위 방어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2. 조직
조선의 군대는 크게 '중앙군' 과 '지방군' 으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중앙군은 오위도총부가, 지방군은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각 지역의 병마절도사가 지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앙군과 지방군의 유기적인 결합도 중요하였기 때문에, 지방군의 일부를 교대로 서울로 올려 보내서 복무를 하게 하였는데, 이를 '번상병'이라고 합니다.
조선 초에는 정규군 외에도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평소에 본인의 일을 하고 있다가 일정 기간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유사시에 대비를 하였습니다. 잡색군에는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이 소속되었습니다.
수군의 경우 육군과 비슷한 형태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다 인근의 각 도에는 '수영'을 두어서 '수군절제사'를 중앙에서 파견하여 각 관할구역별로 통제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수영' 밑에는 '포진'과 '포'를 두었으며 각각 '첨절제사'와 '만호'를 파견하여 수군을 통솔케 하였습니다.
일반 농민(평민)들의 경우에는 '정병, 유방군 혹은 수군' 등에 편입이 되었으며, 정병은 1년에 2달, 유방군은 3달, 수군은 3달씩 복무를 하였습니다.
고급직업군인의 경우, '갑사, 별시위, 내금위' 등이 있어서 무예에 자질이 있는 사람들은 무과 시험을 쳐서 들어갔으며, 정식 '무반'에 소속이 되어 품계와 녹봉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중앙에서는 왕실과 수도의 경비를 맡았고, 지방에 가서는 하급 지휘관으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군사적 위급사태를 신속히 전파하기 위해 교통과 통신체계도 발전하게 되는데, '봉수제'와 '역마참'을 들 수 있겠습니다.
봉수제의 경우 밤에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서 신속하게 정보를 수도인 서울까지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역마참'을 전국에 설치함으로써 육로를 통해 각종 소식뿐만 아니라 물자도 신속하게 운반할 수 있게 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연계가 한층 더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취각령'이라 하여 '비상소집훈련'을 수시로 시행하였는데, 이 취각령이 소집되면 도성 안에 살고 있는 관원들이 일시에 궁궐에 모여 대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사훈련 목적으로 '돌팔매'가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척석군' 이라는 돌팔매꾼 집단들이 중무장한 '갑사'와 함께 광화문 앞에서 서로 싸우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훈련 때마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여 폐지되었고, 나중에는 민속놀이로 바뀌게 됩니다.
지금까지 조선이 군사제도 및 군대조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조선 초기 경제 발달 상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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