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훗날 '요나라') 이 926년(태조 9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거란과 국경을 맞대게 됩니다. 한편 송나라는 중국의 5대 10국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960년)을 이룩하면서 거란과 중국의 영토를 둘러싸고 경쟁 관계를 형성합니다. 고려는 거란과는 적대적인 정책을, 송나라와는 적극적으로 화친을 맺으며 우호적인 교류를 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고려의 대외 방침은 거란과 송나라와 사이에서 서로 대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1. 거란 과의 1~3차 전쟁
거란은 당초 고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여 태조 25년(942년)에 낙타 50필과 30여 명의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조는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 하여 이를 거절하면서, 사신들은 내쫓고 낙타는 만부교에 매달아서 굶어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부상을 하게 되자 송나라와는 적극적으로 화친을 맺고자 하였습니다.
경쟁관계인 송나라와 고려가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에 위기의식을 느낀 거란을 고려를 무력 침공하게 되며, 무려 3차례에 걸친 공격이 이루어 집니다.
먼저 '성종 12년(993년)'에 거란은 '소손녕' 에게 군사 수십만을 붙여주면서 1차로 고려를 공격하게 합니다. 하지만 고려는 '청천강'에서 거란군을 막아내고, '서희'를 통한 외교담판으로 거란군을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거란과 합의를 통해 '압록강'까지 고려의 영토(강동 6주)로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당시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자이며, 여진 땅을 고려가 갖게 된다면 훗날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약속하면서 거란군을 돌려보냅니다. 이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영토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확장시킨 좀처럼 유례를 찾기 힘든 외교사의 쾌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는 거란으로부터 얻어 낸 강동 6주에 성벽을 쌓으면서 훗날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며 국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에 거란은 또다시 불안감을 느끼며 고려에게 강동 6주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합니다.
한편 고려에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여 죽이고 '현종'을 왕위에 세우는 정변을 일으키게 되는데, 거란은 이에 대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현종 원년(1010년)'에 거란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로 고려를 침공' 합니다. 거란군이 현종 2년(1011년)에 개경을 점령함에 따라 현종은 나주로 피신을 하였으나, 거란은 후방에 있는 고려의 저항군에 의해 보급이 끊길 것을 우려하여 현종이 되돌아올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면서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현종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2차례에 걸친 원정이 모두 소득 없이 끝을 맺으면서 거란은 강동 6주의 반환과 현종의 복귀를 핑계로 이후에도 산발적인 침략을 시도하다가 '현종 9년(1018년)'에 본격적으로 '소배압' 이 이끄는 10만 거란군이 3차로 고려에 쳐들어 옵니다.
하지만 고려는 강감찬 장군이 '현종 10년(1019년)'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의 숫자는 겨우 수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를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거란의 수십 년에 걸쳐 3차례의 고려 침공은, 어떠한 소득도 얻지를 못하고 실패로 끝을 맺게 됩니다.
한편 거란 과의 전쟁 과정에서 고려에 투항한 거란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집단을 형성하여 '노래와 춤, 잡희' 등으로 수입을 얻어 생활하게 되며, 이들이 '재인(광대)'과 '기생'의 주류를 형성하게 됩니다.
고려는 3차례의 거란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더욱 안정적인 국외 정세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덕종 2년(1033년)'부터 '정종 10년(1044년)'까지 동해의 도련포(현재 함주 부근)에서 압록강 입구에 이르는 북방지역에 '천리장성'을 쌓음으로써 확장된 영토에 대한 방비를 갖추게 됩니다.
2. 송나라 와의 교류
거란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려는 선진문물을 가지고 있던 송나라와는 적극적인 교류를 추구하였습니다. 송나라 역시 경쟁관계인 거란의 침공을 3차례나 막아낸 고려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며 고려와 가까워 지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두 나라는 빈번한 사신 왕래와 승려, 상인들을 통해 활발하게 경제 및 문화 교류를 하게 됩니다.
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송나라는 고려의 사신을 '조공사'로 부르지 않고 '국신사'로 칭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송나라가 고려를 조공국으로 낮춰보지 않고 대등한 관계로 인식하고 대우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려와 송나라는 주로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와 중국의 양자강 입구인 '항주'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를 통하여 교류를 하였습니다. 고려의 수출품으로는 '금, 은, 동, 인삼, 금은 세공품, 종이, 책, 먹, 붓, 부채, 화문석' 등이었으며, 송나라는 '비단, 책, 자기, 약재, 향료, 악기'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특히 고려의 종이나 먹 등은 그 품질이 우수하여 송나라의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송나라에는 없는 책들을 고려에서 수입하거나 베끼기도 하였습니다. 송나라의 책은 '송판본'이라 하여 고려의 목판인쇄술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송나라의 자기 역시 고려청자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승려들 역시 교류에 큰 축을 담당하였는데,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 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선종 2년(1085년)'에 '금서'로 된 '화엄경' 300권과 수천 냥의 은을 가지고 '항주'에 가서 '해인사'에 '화엄경각' 을 짓고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이 절은 나중에 송나라 황제가 '고려원(일명 고려사)'로 개명을 해주었으며, 청나라 건륭황제 때에는 '법운사'로 바뀌게 됩니다.
고려는 또한 거란, 여진, 일본 등 과도 교류를 하였으나 송나라와 비교하였을 때 그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습니다. 거란과 여진을 통해서 '은, 모피, 말' 등을 받고 '문방구, 철, 동' 등을 주었으며, 일본과는 '문방구, 서적, 식량'을 '감귤, 진주, 수은, 칼, 말' 등과 교환하였습니다. 한편 아라비아(일명 대식국) 상인들과도 교류를 하였는데, 이들을 통해 '수은, 향료, 염료, 약품' 등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은, 비단' 등을 내주었습니다. 이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오늘날 한국의 '코리아'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고려의 대외관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고려 전반기의 문화에 대해 유교, 불교, 풍수지리 등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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