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라 말기 상황
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 말기로 가면서 왕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고, 귀족들은 세력을 키우면서 왕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신라 말 150년 동안 무려 20명의 왕이 교체되고, 그 가운데 여러 명의 왕은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귀족들의 반란은 혜공왕 4년(768년)에 발생한 '대공의 난'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3년간 96명의 '각간' 이 서로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으며, 혜공왕은 결국 귀족들에게 권력을 장악당하고 허수아비 신세가 됩니다.
'김헌창의 난' 역시 대표적인 반란사건으로,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 이라 하고 한때 '무진주(현재 광주), 완산주(현재 전주) 등 전라도 지역'과 '상주, 진주 등 경상도 지역', '원주 등 강원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정부군에 진압당하게 됩니다.
김헌창의 난이 진압된 이후 일시적으로 왕권의 안정화가 이루어졌지만, '흥덕왕' 사후 부터는 다시 왕권은 '실력 쟁탈전'으로 변모하여 왕실은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해상왕', '바다의 왕자'라고 불리었던 '장보고' 역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면서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편 중앙의 왕실과 귀족들이 권력 쟁탈을 벌이는 와중에 지방의 '호족' 들과 오랜기간 권력의 바깥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6두품' 들은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힘을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역시 자신들의 기반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2. 후백제, 후고구려의 성립
후백제를 세운 '견훤' 은 본래 '상주 호족 아자개'와 '무진주 호족의 딸' 사이에 태어나 군인으로 출세한 인물이었으나, 후에 궁핍한 생활로 떠돌아다니던 농민들을 규합하여 진성여왕 3년(889년)에 '무진주'를 점령하고 진성여왕 6년(892년)에는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게 됩니다.
견훤은 백제 유민들의 '반신라 감정'을 이용하여 '의자왕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호 아래 '전주'를 무력으로 차지한 다음, 효공왕 4년(900년)에 전주를 수도로 하여 '후백제'를 세우게 됩니다.
이때 책사의 역할을 한 사람이 6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우' 였습니다. 당시 6두품들은 골품제의 한계로 인하여 실력이 있음에도 뜻을 펼치지 못함에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당나라의 선진 문화를 배우고 갈고닦은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현실의 부조리함을 극복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건국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었고, 지방의 호족세력과 연합하여 그 기회를 잡고자 하였습니다.
후백제는 이후 세력이 더욱 확장되면서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도 지방' 을 차지하여 과거 백제의 영토였던 지역을 대부분 회복하기도 하였습니다. 힘이 더욱 커진 견훤은 결국 경주로 쳐들어가서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고(당시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 왕의 동생과 재상, 그리고 수많은 기술자들을 포획해 갑니다. 이후 견훤은 44년간 후백제를 통치를 하다가 신라 경순왕 9년(935년)에 아들 '신검' 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후 고구려는 효공왕 5년(901년)에 '궁예'가 '송악(현재 개성)'을 수도로 하여 건국하게 됩니다. 궁예는 본래 신라 왕족의 후예였는데,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게 되면서 승려로 생활하게 됩니다. 이후 신라 말 세상이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뜻을 품고 처음에는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이후 '양길'의 부하가 되어 군대를 이끌며 영월, 강릉, 철원, 황해도 일대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궁예의 추종자가 많아지게 되고 책사 '종간'까지 얻게 된 궁예는 마침내 후 고구려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후 후고구려는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꾸고, 수도도 '철원'으로 옮깁니다. 이후 세력이 더욱 확장하게 되면서 북으로는 '대동강', 남으로는 '상주, 공주'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신라, 후백제와 국경을 마주합니다. 또한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두어 '시중' 이 그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병부, 대룡부, 수춘부 등'을 두고 '9 관등'을 제정하는 등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궁예 역시 견훤과 마찬가지로 '반신라 감정'을 이용하였으며, 과거 고구려 호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궁예는 미륵신앙에 빠져 스스로를 미륵불임을 자처하면서 점차 교만해지고 방만하고 포악한 행동을 일삼다가, 왕건에 의해 쫓겨나게 됩니다.
3. 고려의 건국
여러 장수들의 지지를 받아 폭정을 일삼던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송악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무장'인 동시에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무역상인의 후예였습니다. 그는 국호를 '고려'로, '연호'를 '천수'로 바꾸고, 수도를 '철원'에서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현재 개성)'으로 옮깁니다. 한편 당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나라의 자주성을 높이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왕건은 후백제와 신라를 통일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때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우호정책' 을, 후백제에 대해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택하게 됩니다.
이는 신라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그 전통에서 오는 권위를 인정받기 위함으로써, 이를 위해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였을 때에도 왕건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견훤과 맞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신라의 마지막 임금 56대 경순왕은 고려 태조 18년(935년) 스스로 고려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반면 후백제의 경우 당시 신라에 비해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무력을 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19년간 고려와 후백제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게 되고, 마침내 태조 19년(936년)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이때 고려는 후백제의 내분을 이용하게 되는데, 당시 견훤은 44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왕위를 장남 '신검' 이 아닌 넷째 아들 '금강' 에게 물려주려 하였고, 이에 격분한 '신검' 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아들 신검의 행동에 분노한 견훤은 몰래 금산사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을 합니다.
이후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와의 전쟁에 나서게 되고, 사기가 크게 꺾인 후백제를 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라의 항복과 후백제의 정복을 통해서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이 무렵 한반도 밖에서도 큰 정치적 변동이 발생하는데, 907년 당나라, 926년(태조 9년) 발해가 거란에 망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발해의 멸망으로 수많은 발해 유민이 생겼으며, 이 유민들은 대부분 고려로 망명하였습니다. 왕건은 이들을 동족으로 대우하여 땅과 관직, 가옥을 내어줍니다. 특히 발해 세자 '대광현' 에게는 '왕계' 라는 왕 씨 성을 하사하고, 왕실의 족보에도 편입시켜 주어 그를 왕족으로 대우해줍니다.
이와 같이 고려의 통일은 단순히 한반도 내의 후삼국의 통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해까지도 포괄하는 민족통일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후삼국의 성립과 고려의 건국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고려 초기 정치제도와 사회생활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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