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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22. 고려 무신집권 시기 사회와 문화

by 늦게차는큰그릇 2022.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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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란의 발생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농업과 상업도 크게 성장하면서 경제가 발전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력은 소수의 문벌귀족들에게 집중되었고, 왕실 역시 오래된 평화 속에서 점차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정사를 게을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취 체제가 문란해지면서 문벌귀족들은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농민들로부터 수탈과 횡포를 일삼았으며, 왕실에서는 별궁, 누정, 절간 등을 짓기 위해 백성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하였습니다.

 

이후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였지만, 문벌귀족들 때보다 더 가혹한 수탈이 이루어졌습니다. 최충헌의 경우 사택과 격구장을 짓기 위해 민가 100여 채를 헐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수탈과 더불어 흉년까지 겹치게 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으며,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신집권기에 무신들의 하극상이 만연하였을 때의 분위기를 틈타서 농민들도 조직적으로 반란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농민들의 반란은 고려 전역에 걸쳐서 발행하였는데, 주요 민란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저항은 서경에서 발생했는데, 명종4년(1174년) '조위총의 난' 때 농민들이 합세하였으며, 조위총이 패하였음에도 농민들은 묘향산을 중심으로 항쟁을 지속합니다.

 

가장 큰 민란으로는 명종 6년(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발생한 '망이, 망소이의 난'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공주가 점령되었고 충청북도와 경기 일부 지역까지도 차지를 하였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하게 됩니다.

 

전라도에서는 명종 12년(1182년) '전주의 군인과 관노' 들이 40여일 간 전주를 점령한 사건이 있었으며, 경상도에서는 '김사미와 효심' 이 서로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충헌의 노비도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는데, 이를 '만적의 난'이라고 합니다. 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로서 신종 원년(1198년) 개경의 송악산에서 수백 명의 노비를 모아놓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고 외치면서 저항을 꾀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만적의 난 이전까지 대부분의 민란은 양인 신분인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발생했다면, 만적의 난은 민란이 노비 신분들에게까지 확산되고, 그들의 의식 수준이 상당히 고양되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민란은 점점 발전하면서 단순히 '신분해방 및 상승' 을 넘어서 '삼국의 부흥'을 외치는 수준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신종 5년(1202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군인, 승려, 농민들이 자신들을 '정국병마(나라를 바로 잡는 군대)' 라 하며 신라 부흥을 꾀하며 고려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무신 집권기 민란은 결국 무력으로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집권층들은 강경책만 사용하지 않고 세금 감면, 양민으로의 신분 상승, 토지 지급 등의 회유책을 병행하면서 민심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려시대 민란은 고려의 귀족 관료 중심의 신분질서가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며, 당시 양인과 천인 사이에 혼인도 빈번하게 이루어짐에 따라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신분제도를 개편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2. 문학과 종교

무신집권 기간 동안 문신들이 중앙 통치에서 소외되면서 정치의 근간을 이루었던 유학은 후퇴를 하게 됩니다. 반면 문신들은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정치에서의 소외와 좌절감을 문학으로 해소하게 되면서 동기간 훌륭한 문인과 문학작품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당시 '이인로, 임춘,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은 중국의 '죽림칠현'을 모방하여 스스로를 '해좌칠현' 이라 칭하였고, 시가와 설화 등을 지었습니다.

 

이인로의 경우 '파한집(고려 역대 문인들의 명시에 얽힌 이야기와 유적지의 풍속 및 풍경 등 묘사)' 을 지었으며, 임춘은 '공방전(돈을 의인화한 현실 풍자)'과 '국순전(술을 의인화한 현실 풍자)'을 지었습니다.

 

한편 최씨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전과 달리 문신에 대해 예우를 해주자 무신정권에 협조하는 문신들도 생겨났는데, '이규보'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이규보는 '동명왕편(동명왕의 건국설화에 대한 영웅서사시)'을 써서 최 씨 정권의 신임을 얻어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까지 오르게 됩니다.

 

동명왕 편은 문신 김부식의 '삼국사기(신라 계승 의식)'와 달리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으며, 유교적 합리주의보다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과거 고구려의 기상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이인로는 '국선생전(술을 의인화), 백운소설(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시화 모음집), 동국이상국집(이규보의 문집으로 시, 전, 설, 서 등의 모음)' 등을 서술하였습니다.

 

당시 '설화문학' 도 유행하였는데, '최자의 보한집(여항의 이야기, 흥미있는 사실, 부녀자들의 이야기 등 당시 고려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참고자료로 유용)',  '박인량의 수이전',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무신집권기 불교는 문벌귀족 시기의 '개경 중심의 이론불교인 교종' 이 쇠퇴하고, '지방 호족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행동 중심적이었던 선종' 이 유행을 하게 됩니다.

 

최씨 무신정권은 문벌귀족들의 종교라 할 수 있었던 교종을 억누르기 위해 선종을 후원하며 그 세력을 확장시켜 줍니다. (참고로 '요새의 백련결사'의 경우, 천태종이지만 지방호족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강력한 대몽 투쟁을 내세우면서 최 씨 무신정권의 비호를 받기도 합니다.)

 

당시 '보조국사 지눌' 은 선종을 중심에 두고 교종의 화엄사상을 흡수하여 '선종의 교종 통합(선교일치)' 을 추구하는 이론체계를 수립하게 됩니다. 이후 지눌의 사상은 '조계종'이라는 새로운 종파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지눌의 이론은 '정혜쌍수' 인데, 이는 '정(좌선)과 혜(경전)를 함께 병행하여 수양' 하자는 것으로 이는 '돈오점수'라는 방법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문득 부처님의 이치를 깨닫고(돈오)', 이를 '실천에 옮긴다(점수)'라는 방식으로 수양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는 선종 중심의 교종 통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참고로 문종 때 '의천의 천태종' 은 '교종 중심의 선종 통합'을 꾀하였습니다.)

 

지눌의 뒤를 이어서 '혜심' 은 선종 중심의 교종 통합에서 더 나아가 '유교와 불교의 통합' 까지도 꾀합니다.

 

한편 불교사를 새롭게 정비하는 작업도 이루어지게 되는데, 영통사 주지 였던 '승려 각훈' 이 '해동고승전'을 '고종 2년(1215년)'에 편찬합니다.

 

또한 고종 23년(1236년) 에 시작되어 16년 후에 완성된 '제조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는 최 씨 무신정권이 몽고와의 항쟁 기간 중에 강화도 선원사와 진주에 도감을 설치하고,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 해보고자 고려의 구본과 송나라 및 거란 등 여러 나라의 장경을 대조하여 '총 81,137 장'에 이르는 장경을 판각한 것입니다.

 

이 경판은 후에 해인사로 이관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됩니다.)

 

 

이상으로 고려 무신집권기의 민란을 중심으로 한 사회상황과 문학과 종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대몽항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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